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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디가드

보디가드

나에겐 왕좌의 게임 롭으로 더 친숙한 리처드매든이 주연을 맡은 영국 드라마다. 왕겜 볼 때도 잘생겼다 생각했었지만 이 드라마에선 더 잘생겼다. 수염을 밀고 포마드헤어에 멀끔한 정장차림으로 주로 나오기 때문임^_^ 게다가 전직 군인>경찰의 신분이기 때문에 금욕 섹시미가 있음. 거기다 영국식 발음은 또 어떻구요? 극 중에서 애 둘 딸린 아빠로 나오는데 솔직히 처음엔 삼촌?정도로 생각했다. 리처드가 너무 어리게 느껴져서.

 

이처럼 1.주인공이 무척 잘났고 2.에피소드1은 주인공이 기지를 발휘하는 내용이고 3.심지어 드라마 제목까지 보디가드니까 먼치킨 주인공이 펼치는 복수극 따위를 처음엔 상상했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흘러감. 시즌1을 끝낸 내 감상으로 이 드라마는 추리물에 더 가깝다. 그래서 내 성향과 더 잘 맞았던 거 같음. 그리고 세부적인 것들.. 예컨대 폭탄 해지를 어떻게 하는지, 어떤 대화가 오고가고 설득하는지 등등 얼렁뚱땅 넘길 수 있는 부분들을 자세히 보여줘서 좋았고 대사 없이 표정만으로 주인공의 심리를 보여주는 장면 또한 많아서 좋았음. 

 

로맨스도 좀 있는데 이게 불호인 사람들이 꽤 있었다. 왜냐면 리처드의 상대가 나이 많은 여성이었기 때문. 하지만 난 이 부분 역시 다른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구도라 좋았음. 권력을 가진 여성이 부하직원과 관계를 갖는데 그 타이밍이 좀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타이밍이었고 (계속 어떤 신호를 보낸 것도 아니고 갑자기 이뤄짐) 그렇게 때문에 이것이 상호이해관계가 아니라 좀 강압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위력행사처럼. 게다가 부하직원은 일단 잘리면 안 될 이유가 있고, 신뢰도 얻어야 하기 때문에 거기에 응하는데.. 현실세계 남녀를 반전시킨 느낌이었음. 하지만 이게 로맨스로 발전되어 나중엔 부하직원이 '내가 마치 룸서비스 같네요.' < 이런 식으로 투정 부리기까지 하고 ㅋㅋㅋ 청혼도 받는다. 리처드매든은 청혼 받을만 해.. 얼굴이.. 아무튼 얼굴로 모든 개연성이 생기는 그런 로맨스였음.

 

보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은... 주인공이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 되는 일을 너무 어렵게 끌고 간다 였음. 아마 대부분의 시청자가 이렇게 느끼지 않았을까. 


최근 본 영화

최근 본 영화

기생충

봉준호 영화 중 가장 흥미진진하게 본 영화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괜찮게 봤음. 영화를 가지고 논다 싶을 정도로 심장 쫄깃한 부분도 있었고, 캐릭터도 다 매력적이고 개연성도 있으며 메세지도 좋았음. 대부분의 사람들이 민감해 하는 '냄새'를 소재로 이용한 것도 탁월한 생각이었고 '지하철 냄새'에서 약간 뒷통수 맞은 느낌으로 봤다. 보고나서 2차를 찍겠거니 싶었는데 찍어야 한다는 생각이 별로 안 든다. 왜죠? 혼자 갸웃하다가 얼마 전 트윗에 알티된 글을 보고 깨달았다. '가난한 집안은 결코 화목하지 않다.' 내가 위화감을 느낀 부분이 이거였던 것 같음. 반지하에서 하루종일 함께 부대끼면서 서로를 한심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는 한국 가정이 과연 존재하나 하는 거였음.. 빈부격차와 계급사회 이야기를 좋아하는 봉준호가 개인 같은 작은 단위를 얘기하면 어떻게 될 지 궁금해진다. 이번 작품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얘기 많이 나오던데 글쎄... 난 오히려 박찬욱이 더 많이 떠올랐음. 예전에 박찬욱에게서 느꼈던 그 모랄까 약간 그 팬픽적인 요소라고 해야하나<ㅋㅋㅋ 이렇게 밖에 설명이 안됨. 웹소설 같은 요소 있잖아요. 보여주고 싶은 장면만 강렬하고 빠른 전개로 보여주는 .. 모.. 그런 걸 느꼈었다. 길게 쓰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아무튼 전개 빨라서 재밌었다는 얘기.

 

플로리다 프로젝트

에구 저렇게 살면 안될텐데 어쩌나... < 하는 할머니의 시각으로 봤음 ㅋㅋ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려고 발버둥을 쳐봤지만 실패하는 장면이 가장 안타까웠다. 결국은 부모의 자격이 없다며 아이를 빼았고 몸을 팔았다며 흉을 보고... 모두 개인의 책임으로 돌아가는 방식이 남일 같지 않았음. 엔딩은 씁쓸하다. 주인공 아이의 미래가 결코 장미빛이 아닐 거란 걸 아는 어른이 만든 결말 같다. 어떻게든 아이는 행복하게 살았다고 동화같은 결말을 주고 싶은 어른의 마음. 어떤 나무는 쓰러져도 계속 자란다고.

 

브레인 온 파이어

클레이 모레츠 내 눈에는 아무리 봐도 윤정수 여자버전으로 밖에 안 보이는데 도대체 무슨 매력이야 하고 봤다가 끊지 못하고 끝까지 봤던 영화. 생각보다 몰입되게 잘 만들었고 클레이의 연기도 약간 과장된 듯 싶으면서도 괜찮았다. 근데 결말이 얼렁뚱땅 나버림... 물론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얘기라 해피엔딩인 건 좋은데 'ㅅ' 재활과정이 거의 다 생략되고 너무 멀쩡한 모습으로 끝나서 오잉? 싶었음. 중간에 시계를 그리는 장면을 보고 어 이거 한니발에 나왔던 건데~ 했음ㅋㅋ

 

미스 슬로운

감상 후기 대부분에 제시카 차스테인 얘기 밖에 없길래 무슨 캐릭터일까 되게 궁금했는데 보고 나니 그럴만 했다~ 임. 승리를 위해 돌진 밖에 모르는 이 구역의 무법자 같은 느낌이었으나 알고보니 신념도 있고 의리도 있었다...는 이야기. 물론 의리는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차차 생긴 것이지만... 난 논리로 무장한 대사가 많은 콘텐츠 좋아하는 편인데 이 영화는 기가 빨릴 정도로 말이 빠르고 많다. 미드 <뉴스룸>의 반가운 얼굴도 몇 보이고요. 개인적으로 좋았던 장면은 청문회에서 몸 파는 남자가 등장하고 퇴장할 때까지의 제시카의 연기다.

 

머더 미스터리

내가 좋아하는 F1관련 얘기가 나온다고 하고 요즘 반응도 좋다길래 넷플릭스 끊은 겸 봤다. 일단 제니퍼와 아담은 무슨 진짜 부부 같음. 티키타카 잘 맞다못해 너무 걸죽한 느낌ㅋㅋ 신선한 조합이네? <이것보단 약간 진짜 지겨운 부부싸움 보는 느낌으로 보게 됨. 추리는 거의 그냥 무슨 순대 찍어먹는 소금 수준으로 조금 나온다. 추리물을 좋아하는 입장으로선 좀 부족했음. 그냥 코믹느낌으로 보면 됨. F1 내용은... 내장도 주세요라고 말했는데 다 떨어져서 꼭다리 남은 거 서비스로 가져온 수준으로 들어가 있음 ㅋㅋㅋ 이 영화 F1관련 오류 몇 가지를 써보자면 일단 F1 레이서 중에 영어를 못하는 사람은 없다고 보는 것이 맞고...(뒤에 물론 나오지만) 모나코 레이스는 목, 토, 일 이렇게 이뤄지기 때문에 선상에서 그렇게 희희낙락할 시간도 없으며 연기자가 탄 주황색 차는 맥라렌인데... 모나코에서 결코 1등을 할 수 없는 차다ㅠㅠ 그래도 맥라렌 팬으로서 잠깐 행복했다...

 


사육사와 짐승

사육사와 짐승

미루는 일에 다분히 천재적이던 나는 툭하면 설거지가 쌓이기 일쑤였다. 하루, 이틀 지나는 건 대수롭지 않았고 설거지를 해놓은 젓가락이 없어서 썼던 걸 또 한 번 썼다가 탈이 났던 적도 있었다. 동생과 함께 살 땐 이런 내 버릇 때문에 자주 싸웠다. 물론 동생도 지지 않고 설거지를 쌓아두었기 때문에 싸움이 가능한 것이었지만... 이런 내 습관이 병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올해 초의 일이다. 당시 나는 스캇펫의 <아직도 가야 할 길>을 읽었는데 그 책에 따르면 일을 미루는 습관, 눈앞의 즐거움을 좇고 해야 할 일을 외면하는 것은 자신의 시간이 그다지 소중하지 않다는 의미 즉,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생각해보니 어느 정도 수긍이 됐다. 동시에 이 나쁜 버릇을 얼른 고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그 책을 읽기 이전부터 나는 나의 게으름에 이미 이골이 나 있었다.

 

한때 영드<미스 마플>에 푹 빠졌을 때가 있었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물인데 마플이라는 예리한 할머니가 살인사건의 범인을 잡는 이야기다. 방영 당시 시리즈 반응도 꽤 좋았다고 알고 있다. 아무튼 거기서 내가 사랑에 빠진 인물은 당연히 마플이었다. 어느 정도였느냐면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 '저렇게 늙고 싶다.' < 이 정도였음 ㅋㅋ 사람을 간파하는 통찰력, 예리한 추리, 다정한 심성 등등 확실히 매력적인 캐릭터였지만 내가 그녀를 롤모델로 삼고자 했던 결정적 이유는..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마플은 욕실에 들어가 거울만 보고 바로 나오려고 했는데 삐뚤게 걸려있는 타월을 발견했다. 눈에 밟히긴 했지만, 곧 떨어질 것처럼 심하게 삐뚤어진 건 아니고 그냥 살짝 어긋난 수준이다. 마음에 안 드는 모양새이긴 하지만 딱히 수정하지 않아도 괜찮을 그런 상황의 경우, 마플 그 할머니는 느릿느릿 움직여서 타월을 반듯하게 정돈하고 욕실을 나선다. 칼각을 맞추는 강박증에 매력을 느끼는 게 아니라 자신의 환경이 마음에 안 들 때, 눈에 밟히는 부분이 있을 때 미루지 않고 바로바로 수정하는 그 부지런함에 매력을 느꼈다. 나의 삶을 해치는, 나의 균형을 깨뜨리는 사소한 일을 맞닥뜨린 순간 행동한다는 것. 나에겐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가. 난 밥통 뚜껑에 때가 좀 끼어있어도 놔두고 냉장고에 버려야 할 음식이 눈에 띄어도 그냥 모르는 척한다. 설거지를 미루는 것도 나에겐 비슷한 이치다.

 

그런데 놀랍게도 2~3주 전부터 설거지를 미루지 않는다. 

나는 식사를 하면 꼭 후식으로 음료나 달콤한 것(과일, 쿠키) 등을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식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이용해 나만의 룰을 만들었다. 설거지하기 전까지 후식을 먹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마지못해 고무장갑을 끼고 냉장고 속에 있는 음료를, 찬장에 있는 쿠키를 생각하며 설거지를 한다. 마치 사육 같다. 개나 고양이 짐승을 길들이는 일과 하나도 다를 게 없고 날 더 슬프게 만드는 건 이 방법이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효과가 있어서 멈출 수가 없다. 몇 주째 싱크대가 깨끗하고 미뤘다는 죄책감 없이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 있어 보니 도저히 멈출 수가 없는 현실... 이게 나라는 짐승을 길들이는 사육사가 아니고 무엇인가요..

 

되고자 하는 사람이 되는 것. 살고자 하는 삶을 사는 것은 정말 너무 어렵고 죽기 직전까지 이렇게 사육하며 살지 않을까. 슬픈 예감이가 들어버려... 그래도 방법을 찾은 것 같아서 해피엔딩이라고 해야할까. 모르겠다. 눈물이 앞을 가려서...

 


십이국기 봤음(애니)

십이국기 봤음(애니)

정말 오래간만에 애니메이션을 봤다. 동양 고전 판타지가 보고 싶어서 커뮤에 글을 남겼는데 <십이국기> 이름이 가장 먼저 보였다. 책이 나왔지만 이북은 아직 없고, 애니메이션은 나온 지 꽤 되었으나 연중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책은 올해 9월쯤 완결 예정) 책을 볼까 싶었지만 내 취향이 아닐 경우를 생각해 애니메이션부터 보기로 했다.

 

애니메이션 <십이국기>는 일본에 살던 주인공이 다른 차원의 세계에 떨어지는 내용이다. 이렇게 간략히 말하면 정말 흔해 빠진 판타지처럼 느껴지나, 나는 나름 재미있게 봤다. 

 

1.성장물

<십이국기>를 매력적으로 만들어 주는 것 중 하나는 성장물에 있다. 솔직히 제목만 봤을 땐 12개의 나라가 싸우는, 그래서 주인공격인 사람이 통일하는 그런 단순한 중국 무협?ㅋㅋㅋ 소설을 상상했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대부분 등장인물의 성장에 맞추어져 있다. 때문에 갑자기 캐붕이 일어난다든지 납득이 안 되는 경우가 별로 없다. 아마도 텍스트의 형태로 컨셉이 세세하게 잘 잡혀있기 때문이지 않나 싶다. 애니를 보다보면 어떤 장면은 말로 때우고 지나간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그래도 흐름이 끊기지 않는 걸 보면 텍스트가 정말 중요하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듦.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음.

 

2.세계관

세계관 역시 독특하다. 12개의 나라에 각각의 왕과 기린이 존재하고 그들은 천명으로 점지되는 존재들이다. 세계관만 보면 되게 민주적이지 않은... 군주제 같은 느낌이 드는데 이 역시 성장물을 위한 장치처럼 잘 쓰인다. 보다보면 90년대 초반 이야기 답지 않게 여성의 동등한 지위나 위치가 느껴지는데 아무래도 여성이 출산하지 않는 세계관의 영향이 크다. 이곳은 기도하면 아이가 나무에 열매처럼 맺힌다. 요마나 요괴에 너무 치중하지 않은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보단 어느 위인의 전기에 가깝고, 정치나 역사를 기록한 것처럼 느껴짐.

 

좋은 점은 이렇게 두 가지이고,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좀 힘들었던 건 등장인물들의 성격이다. 주인공부터 시작해서... 마음에 드는 캐릭터가 거의 없었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니가 나보다 더 불행해?" "그 자린 원래 내 자리여야했어!" "너무해!" 이런 대사 나올 때마다 고구마 100개 먹는 느낌으로 봐야했음. 그나마 마음에 드는 캐릭터는 공주국의 슈쇼우였음. 맞는 말만 하는 사이다 왕..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봤지만 역시 연중이라서 그런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적어도 대극국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보여주고 연중을 했어야지...! 이것 때문에 책을 볼까 싶은 마음이 들었었다. 하지만 이북이 없어서 고민 좀 해봐야 할 것 같다.

 


여행을 왜 가죠

여행을 왜 가죠

예능<대화의 희열>에 김영하 작가가 나온 것을 보고 이 글을 쓴다.

오늘 방영된 이 방송은 주로 김영하 작가의 신작 <여행의 이유>에 걸맞게 여행이 주는 매력과 여행을 기억하는 방법, 여행에 관한 에피소드 등으로 이뤄졌다. 방송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던 나는 좀 실망했다. 작가의 삶을 엿볼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여행이야기가 주를 이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난 여행에 별 큰 흥미가 없다. 여행이라 하면 집 밖을 떠나는 것이고, 비행기를 타든 자동차를 타든 일단 목적지에 도착하면 돌아다녀야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먼 곳으로 가서 호텔에만 있다면 그건 돈과 시간을 버리는 행위에 가깝고 제대로 된 여행을 했다고 보긴 힘들다. 즉, 여행이랑 일단 집 밖을 돌아다녀야 한다는 거다. 난 그게 족쇄처럼 느껴져서 싫은 것이고... 인도어 인간에게 3~4일 무조건 외출이라는 건 너무 가혹함.

 

그럼 여행 가서 관광 조금 하고 호텔에만 있으면 되잖아? < 이건 내 성격상 용납이 안 되는 것이다 ㅋㅋㅋ 존나 어쩌라는 건지 싶다. 나도 이런 내 성격이... 일단 여행을 가면 본전을 뽑으려는 나의 이 알 수 없는 근성 때문에 무조건 무리한다. (아마도 여행을 자주 다니지 않아서 이곳에 다시 올 일 없을 거라는 강력한 예감 때문에 강행군하게 되는 것 같음) 그래서 3~4일 정도 긴 여행을 다녀오면 병이 난다. 즐거웠지만 다신 보지 말자가 되어서 아마 여행을 더 기피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여행의 매력을 못 느끼는 건 아니다. 풍경을 찍는 걸 좋아하는데 집 근처에서 얻을 수 없는 여행지의 풍경들은 정말로 매력적이고 내 키와 시야가 주는 한정적 구도를 사랑한다. 여행을 가서 찍어온 사진을 두고두고 보는 편이고 사진을 생각하면 떠나고 싶어진다. 눈이 쌓인 산이나 벌레 많은 정글 같은 곳도 불사하고 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사진만 보면. 게다가 거기 사는 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나보다 나아보이는지 모른다. 출퇴근 하기 급급하고 여유 없는 내 삶에 비해 여행지 주민들은 항상 여유있어 보인다. 순간순간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매력에도 불구하고 내가 떠나지 않는 이유는 그 정도의 매력이기 때문이다. 남이 가진 여유를 구경하거나 사진 몇 장 건지러 돈과 시간을 쓸 여유가 내겐 없다. 예전에 같이 일본 여행 갔던 친구가 그랬다. 자신은 여행에 대한 매력을 잘 못 느끼지만, 여행은 부와 여유의 상징이기 때문에 자신은 무리해서라도 간다고. 처음 그런 얘기를 들었을 때 정말 세속적이고 얄팍한 이유라고 생각했는데... 여행이 부는 모르겠지만 여유의 상징인 건 맞는 것 같다. 먹고 사는 문제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그런 여유. 돈을 지불하면 잠시나마 맛보게 되는 여유라고 생각한다. 물론 다녀와서의 현타는 제각각이겠지만...

 

내가 바라는 건 월급을 아껴서 여행을 다녀오는 것 말고, 여행하는 기분으로 이곳에서 사는 것이다. 어느 정도 잘 지켜지고 있는 거 같다. 내가 이렇게 외로운 걸 보면.

 

영화 비포선라이즈


너의 만족도는

너의 만족도는

요즘 밥을 잘 먹는다.

일을 그만두고 나서는 오전 느지막이 일어나 아빠의 전화를 받고 함께 점심을 먹을 때가 많다. 집 떠난 지 10년, 어린애 같던 내 입맛이 어른의 반열에 도달하여 함께 먹을 만했고, 아빠 역시 나이를 먹어 가족을 챙긴다. 떨어져 살 땐 서로 문자나 전화가 뜸했다. 둘만 같이 있으면 어색하기 때문에 되도록 그런 상황을 피해왔는데 지금은 일주일에 적어도 한 두 번은 함께 점심을 먹는 사이가 됐다.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절대 안 맞을 것 같던 아빠와도 이렇게 맞물리는 타이밍이 생기는구나. 인생 신기하다, 신기해. 올해 초만 해도 내가 아빠와 이렇게 자주 점심을 먹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인생 정말 신기하지.

 

일주일에 한 번은 평거동에서 밥을 먹는다.

평거동은 부모님이 사는 동네다. 바로 어제도 다녀왔다. 김치찌개를 먹었는데 나도 요리를 도왔다. 요리를 도우면서 얼마 전 면접 본 회사에 대해 말했다. 합격이라고 연락이 왔지만, 연봉이 맞지 않아 가지 않기로 했다고. 이곳은 경력직 연봉 후려치기가 너무 심한 것 같다고. 가만히 듣고 있던 엄마가 물었다. "여기(고향) 내려와서 너의 만족도는 어때?" 잠시 말문이 막혔다. 솔직하게 답하기 어려웠다. 만족스럽다고 얘기하지 않으면 엄마의 표정이 어두워질 것 같았다. 그래서 난 만족스럽다고 대답했다.

 

엄마의 질문은 서울과 고향, 둘 중에 어느 곳이 더 살만하냐는 질문이었을 것이고 나도 그에 맞춰 적당히 대답했지만, 솔직히 삶의 만족도를 객관적으로 따져본다면 지금의 난 높지 않다. 만족스러운 삶? 그런 게 세상에 있긴 하나? 이런 속마음을 내비치면 엄마는 '넌 너무 냉소적이야.'하고 말할 게 뻔하다. 영화<미스 슬로운>에서 제시카 차스테인이 이런 말을 한다. 냉소적이라는 말은 낙관주의자들이 자신의 순진함을 보여주기 위해 애쓸 때 쓰는 말이라고.

 

사람은 좀 냉소적이어도 된다. 내가 원하는 삶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인정하고 방법을 찾는 것이 <만족스러운 삶>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는 길이라고 믿는다. 세상엔 욕망처럼 훌륭한 원동력이 없고 더 나은 삶을 바라는 것은 죄악이 아님을... 글쓰는 걸 좋아하지만 어떤 글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 현재 내가 <만족스러운 삶>에 도달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이다. 그래서 어젯밤 잠들기 전에 매일매일 무언갈 써 보기로 다짐했다.

 

 

이곳에 온 지 벌써 4개월. 학창시절을 보냈던 곳이라 적응이 어렵진 않았지만 이사 후 내 생각과 다르게 흘러간 부분이 없지 않다. 한 번 돌아볼 때가 된 것 같다. 내가 이곳에 오면서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얻었는지. 그럴 가치가 있는 일이였는지. 그리고 앞으로 나의 계획은 또 얼마나 나를 배신하고 나를 놀래킬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