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사와 짐승

사육사와 짐승

미루는 일에 다분히 천재적이던 나는 툭하면 설거지가 쌓이기 일쑤였다. 하루, 이틀 지나는 건 대수롭지 않았고 설거지를 해놓은 젓가락이 없어서 썼던 걸 또 한 번 썼다가 탈이 났던 적도 있었다. 동생과 함께 살 땐 이런 내 버릇 때문에 자주 싸웠다. 물론 동생도 지지 않고 설거지를 쌓아두었기 때문에 싸움이 가능한 것이었지만... 이런 내 습관이 병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올해 초의 일이다. 당시 나는 스캇펫의 <아직도 가야 할 길>을 읽었는데 그 책에 따르면 일을 미루는 습관, 눈앞의 즐거움을 좇고 해야 할 일을 외면하는 것은 자신의 시간이 그다지 소중하지 않다는 의미 즉,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생각해보니 어느 정도 수긍이 됐다. 동시에 이 나쁜 버릇을 얼른 고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그 책을 읽기 이전부터 나는 나의 게으름에 이미 이골이 나 있었다.

 

한때 영드<미스 마플>에 푹 빠졌을 때가 있었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물인데 마플이라는 예리한 할머니가 살인사건의 범인을 잡는 이야기다. 방영 당시 시리즈 반응도 꽤 좋았다고 알고 있다. 아무튼 거기서 내가 사랑에 빠진 인물은 당연히 마플이었다. 어느 정도였느냐면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 '저렇게 늙고 싶다.' < 이 정도였음 ㅋㅋ 사람을 간파하는 통찰력, 예리한 추리, 다정한 심성 등등 확실히 매력적인 캐릭터였지만 내가 그녀를 롤모델로 삼고자 했던 결정적 이유는..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마플은 욕실에 들어가 거울만 보고 바로 나오려고 했는데 삐뚤게 걸려있는 타월을 발견했다. 눈에 밟히긴 했지만, 곧 떨어질 것처럼 심하게 삐뚤어진 건 아니고 그냥 살짝 어긋난 수준이다. 마음에 안 드는 모양새이긴 하지만 딱히 수정하지 않아도 괜찮을 그런 상황의 경우, 마플 그 할머니는 느릿느릿 움직여서 타월을 반듯하게 정돈하고 욕실을 나선다. 칼각을 맞추는 강박증에 매력을 느끼는 게 아니라 자신의 환경이 마음에 안 들 때, 눈에 밟히는 부분이 있을 때 미루지 않고 바로바로 수정하는 그 부지런함에 매력을 느꼈다. 나의 삶을 해치는, 나의 균형을 깨뜨리는 사소한 일을 맞닥뜨린 순간 행동한다는 것. 나에겐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가. 난 밥통 뚜껑에 때가 좀 끼어있어도 놔두고 냉장고에 버려야 할 음식이 눈에 띄어도 그냥 모르는 척한다. 설거지를 미루는 것도 나에겐 비슷한 이치다.

 

그런데 놀랍게도 2~3주 전부터 설거지를 미루지 않는다. 

나는 식사를 하면 꼭 후식으로 음료나 달콤한 것(과일, 쿠키) 등을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식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이용해 나만의 룰을 만들었다. 설거지하기 전까지 후식을 먹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마지못해 고무장갑을 끼고 냉장고 속에 있는 음료를, 찬장에 있는 쿠키를 생각하며 설거지를 한다. 마치 사육 같다. 개나 고양이 짐승을 길들이는 일과 하나도 다를 게 없고 날 더 슬프게 만드는 건 이 방법이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효과가 있어서 멈출 수가 없다. 몇 주째 싱크대가 깨끗하고 미뤘다는 죄책감 없이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 있어 보니 도저히 멈출 수가 없는 현실... 이게 나라는 짐승을 길들이는 사육사가 아니고 무엇인가요..

 

되고자 하는 사람이 되는 것. 살고자 하는 삶을 사는 것은 정말 너무 어렵고 죽기 직전까지 이렇게 사육하며 살지 않을까. 슬픈 예감이가 들어버려... 그래도 방법을 찾은 것 같아서 해피엔딩이라고 해야할까. 모르겠다. 눈물이 앞을 가려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