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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테라스에 펭귄이 산다

우리집 테라스에 펭귄이 산다

소설이 아니라 실화를 쓴 수필이라는 점을 간과해서 그런지 읽는 내내 흐름이 끊겨서 혼났음. 저는 귀여운 펭귄이야기만 읽고 싶은데 '외국에서 교사로 일하며 펭귄을 만났던 나'에 포커스가 완벽히 맞춰져 있어서 아쉬웠음. 

격동의 시절 아르헨티나에서 부유한 나라 출신의 백인남성으로 지내며 겪은 일이다 보니 그 나라에서 벌어지는 참상의 대부분이 타자화 되어 있어서 읽으면서도 좀 미묘한 기분이 들었음. 

물론 펭귄이 나오는 부분은 좀 귀엽게 잘 썼다. 그리고 반려동물에게 내가 느끼는 감정들이 가감없이 솔직하게 고스란히 글로 옮겨져 있어서 좋았음. 

그 시절에 그런 멋진 경험해서 부럽다.


비행운

비행운

-몸이 먼저 알아채 몸이 나서서 요구하는 것들이. 이를테면 설에는 떡국이, 보름에는 나물이, 추석에는 송편이, 생일에는 미역국이, 동지에는 팥죽이 먹고 싶다는 식의. 그래야 장이 순해지고, 비로소 몸도 새 계절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다는, 어느 때는 너무 자명해 지나치게 되는 일들이 말이다. 제사는 조상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지내줘야 했다. 기옥 씨는 음식으로 자기 몸에 절하고 싶었다. 한 계절, 또 건너왔다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시간에게, 자연에게, 삶에게 '내가 네 이름을 알고 있으니, 너도 나랑 사이좋게 지내보자' 제안하듯 말이다. 기옥 씨는 그걸 '말'이 아닌 '감'으로 알았다.  

-힘든 건 불행이 아니라... ... 행복을 기다리는 게 지겨운 거였어.  

-이런저런 곁눈질과 시행착오 끝에 가까스로 얻게 된 한 줌의 취향. 안도할 만한 기준을 얻는 데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었던지. 상품 사이를 산책할 때 나는 엄격한 동시에 부드러운 사람이 됐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있다는 데서 오는 여유. 그러나 원하지 않는 것 역시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식의 까다로움.  

-그녀는 단순하고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좀체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정작 그 안에는 훌륭해지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보통의 기준에 다다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여자들이 많았지요. 무엇이 보통인지는 모르지만, 그저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는 곳 언저리에 금이라도 한번 밟아보려 애쓰는 사람들이요.  

-참 언니, 이번에 아기 엄마 되신 거 진심으로 축하해요. 언니를 못 본 새 언니가 그렇게 멋진 일을 해내리라곤 상상하지 못했어요. 만일 제가 언니의 아기라면 내 엄마가 언니란 사실이 무척 기뻤을 거예요. 

김애란 <비행운> 

읽는 내내 너무나 우울했던 책. 그 이유는 아마 이 악몽 같은 소설 속에서 내가 살고 있기 때문이겠지. '참 언니, 이번에 아기 엄마~' 저 구절에서 한참 울었다. 정말 최고로 사랑스럽고 따뜻한 문장이 아닌가. 저런 말을 듣는다면 난 평생 저 말을 곱씹으면서 살 것 같다. 이상순이 이효리에게 말한 '너랑 노는 게 제일 재밌어.'도 너무나 이상적이고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저 말은 무게 자체가 다르다. 크... 문문이 표절했다던 '너는 겨우 자라 내가 되겠지.' 이부분은 나중에 작가에게 허락을 받았다고 함. 개인적으론 한국에 사는 여성의 서사를 축약한 문구라고 생각했다. 작가의 의도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브루투스의 심장

브루투스의 심장

(스포있음) 예스24에서 히가시노게이고 단편세트를 사는 바람에 올해 봄부터 줄기차게 읽고 있다. 단편세트엔 총 9권이 들어있었는데 이게 벌써 다섯번째 책이다. 앞으로 4권. 책 읽는 시간이 아무리 오래 걸리는 나라도 올해 안에 다 보겠다 싶다. 정작 유명한 작품들은 못 읽어서^^ 아쉽긴 하지만...  

아마 내가 산 단편 모음에서 그나마 유명한 게 이 <브루투스의 심장>인 것 같다. 1989년 작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 작품이라고 한다. 어쩐지... 읽을 때도 좀 이상하다 싶은 점이 있었다. 뱃속의 애기 혈액형이 뭐 그렇게 중요하지? 유전자 검사하면 끝날 일을.. 이런 생각하다가 아, 이게 최근에 나온 작품이 아닐 수도 있겠다 싶었다. 게다가 휴대 전화가 아닌 자동응답기가 나오는 것도 그랬고. 그런 시대에 로봇 제작 회사가 배경으로 나왔다는 건 무척 신선한 소재가 아니었을까. 게다가 부품실의 이야기나 근로자의 생활 이야기, 사내 정치적인 이야기까지 무척 리얼하다. 작가가 이공계출신으로 전기회사?에 있한 경력이 있어 그런 거겠지. 그래도 몇 작품 읽었다고 이제는 어렵지 않게 유추가 가능하다. 

지금까지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중 가장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수상한 사람들>이나 <그대 눈동자의 건배>,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등의 작품을 읽으며 이 작가가 아주 뛰어난 이야기꾼이라는 걸 짐작했지만 사실 내가 바랐던 추리소설의 스릴감은 좀 떨어지지 않나 싶었다. 왜냐면 내가 그의 추리소설을 많이 보지 못한 것도 있고, 본 작품도 사실 일반인이나 형사의 입장에서 범인을 유추해 나가는 식이었기 때문에 '재밌다'는 감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다르다! 

<브루투스의 심장>에선 나쁜 사람이 주인공이다. 아니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나쁜 사람은 아니었음. 다른 이들보다 야망이 좀 더 컸고 가족의 정이라는 걸 모르고 자랐을 뿐었지만 소설 마지막엔 아주 '나쁜' 사람이 되어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범죄 계획을 세우고 그걸 실행에 옮기는 모습은 <하우스오브카드>의 주인공이 생각날 정도였다. 차이점이 있다면 난 가끔 하오카 주인공을 응원할 때도 있었는데 여긴 응원할만한 인물은 없었음. 하오카 주인공이야 시작부터 배신 당하며 시작하기 때문에 응원하게 되었지만 여기 주인공은 ㅈ을 잘못 놀려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이 악물고 공부해 좋은 곳에 취업한 똑똑한 주인공이 왜 그런 잘못을 저질렀나 본인도 스스로 반추해 보는데 결론은 '여자가 너무 매력적이었다.'라고 내림. 한순간 눈 앞의 욕망에 넘어간 것을 남탓하는 모습이 좀 비호감이었고 거기 그런 남자 3명 등장해서 웃겼다. 

어쨌든 이 3명이서 살인계획을 세우는데 시체릴레이라는 발상은 아주 그럴싸했다. 이론만 보면 완벽해 보였고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점에 초점이 맞춰져 아주 흥미로웠다. 살인 후 수습하는 방법에서 저자의 다른 작품 <호숫가 살인사건>이 떠오르긴 했지만 <브루투스의 심장>쪽이 훨씬 더 쫄깃했다. 시체의 정체가 밝혀졌을 때는 정말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고. D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땐 그렇게 놀라지 않았지만 나름 개연성이 있는 설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A가 첫번째 순서를 맡게 되었을 때, 결과에 순순히 수긍하는 걸로 보아 저 도련님이 딴 사람 시키는 거 아닌가 하는 의심부터 먼저 했었으니...(물론 자발적으로 첫번째 순서를 맡게 조작할 줄은 몰랐음) 처음 바뀐 시체를 보고 나도 야스코가 범인 아닌가 했지만 계속해서 그 비서장면을 보여주는 바람에 범인을 일찌감치 눈치채 버렸다. 그래도 재밌었음^_^ 

주인공이 자신이 개발한 로봇에 '브루투스'라는 이름을 왜 붙였는지 궁금하다. 브루투스는 누가 들어도  배신의 아이콘이 아닌가. 세상 모든 인간을 불신하던 주인공이 유일하게 믿었던 존재가 로봇이지만 나중엔 이 로봇에게 배신당한다.. 라는 빅피쳐를 그린 작가야 로봇에게 브루투스라는 이름을 주기 어렵지 않겠지만요? 주인공이 자신이 믿는 유일한 로봇에게 브루투스라는 이름을 줬다는 설정이 아이러니함. 책에 이 내용이 나와있는데 내가 놓쳤나? 모를... 

진짜 더 많은 사람을 죽인 범인이 처벌 받는 장면이 나오지 않고 끝나서 찝찝하다는 후기를 몇 개 봤는데, 난 오히려 빨리 끊어버려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왜냐면 간만에 느낀 이 스릴감이 사라지고 뒤로 갈수록 질질 끈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 명 죽이면 또 한 명을 죽여야 하는 주인공 욕심 때문에 좀 많이 질려가는 상황이었음. 다행이 마지막에 비서를 죽이려고 할 때 어쩌다 내가 이 지경이 된 거지? 하고 주인공이 불현듯 생각한 장면이 있어 그나마 끝 장면도 유의미하다고 생각함. 한편으론 주인공 주변에 누군가가 있었다면. 가족이든 친구든 애인이든... 대화할 상대가 있었다면 브레이크 잡기 더 쉽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죽거나 잘못된다 가정했을 때 슬퍼할 사람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면 그렇게 불나방처럼 달려들지 못했을 것을...  

전반적으로 흥미진진한 작품이었고,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면 내용 중 '젊은 여자들이 으레 그러하듯' '젊은 사람들이 그렇듯' 같은 뉘앙스로 얼렁뚱땅 묘사한 부분에서 '하여간 요즘 애들은~' 식의 꼰대스러움이 간간히 엿보였음. 게다가 사치스럽고 신분상승을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는 여자..에 대한 판타지가 있는 건지 뭔지 이 작가의 책에 등장하는 여자 등장인물이 매번 비슷비슷하고 성격도 다채롭지 못해 한 번도 여성으로서 캐릭터에 공감간 적이 없다..는 점만 빼면 읽을 만 했다. (이 말의 뜻은 나는 이 책의 여자 등장인물처럼 사치스럽지 않은데! 가 아니라 매번 나오는 캐릭터마다 비슷비슷한 성격이라 현실감 있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얘기임. 그냥 딱 가공의 캐릭터 같음.) 그나마 현실감 있게 느껴졌던 여성 캐릭터는 매스커레이드 호텔의 주인공이었음. 

길게 쓸 생각은 없었는데 아무튼 간만에 재밌는 작품을 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