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할 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그대는 할 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좋았던 구절


- “서울 애들, 학원이 끝나고 난 뒤에 지들끼리 어디론가 사라지는데 대단한 것 같더라구. 어디로 가는지, 멋진 곳으로만 가는 것 같더라니까. 몇 달 지나고 나니까 다 알겠어. 어디로들 사라지는지.. 당구장 아니면 극장, 극장 아니면 술집. 걱정 마, 우리는 다 똑같아. 삼시세끼, 밥 포기못하는 이상 똑같어, 우리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이란 그러나 가난한 음식은 아닙니다. 가진 것이 별로 없는, 그러나 흥이 많은 이들이 그런 음식들을 기꺼워하며 먹게 마련이죠. 이를테면 가진 것은 없어도 산천경계 좋은 풍경에 잘 취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 내가 날씨에 따라서 변하는 사람 같냐구요? <이 전문다 좋음. (중략)날씨라는 게 얼마나 사람 마음을 변하게 하는 데요. 주위 환경에 민감한 게 뭐 잘못된 것도 아니구요. 저는 제가 마음이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는 아주 인심이 후하답니다.(중략)나이 든 교수님이 뭐라고뭐라고 하시는데 머리에 들어오지 않구요. 다만 흐린 날이면 따뜻한 우유에다 카카오 가루를 타 마시면서 이불 밑에 앉아 애거서 크리스티 영화나 보았으면 합니다.


- 고고학의 기술이 아무리 발전을 했다고는 하지만 발굴을 하는 이들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발굴을 하면서 많은 사실이 기록되지 않고 헝클어진다는 것을.


- 사십 년 동안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일터로 가서 정해진 일을 마치고 돌아와 다시 잠자리에 들고 깨어나 일터로 가고...... 충분하다는 생각...... 그런데 사모님 말씀. "되돌아보면 아무 일도 내 인생에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아요."


- 그때 우리가 나누던 이야기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데, 웃기는 일은 말이 많은 건 내 쪽이었는데 정작 내가 그 많은 말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다니...... 아마도 그래서, 말 많은 쪽이 나라서, 그 말에서 도망가고 싶은 내 마음의 어느 구석이 나를 떠밀어 다른 기슭으로 보낸 걸 거다. 그 말이라는 거, 내가 했던 그 많은 말이라는 거......


- 할머니는 아드님을 쫓아 물로 들어갔다고 한다. 눈이 흰 불을 쓴 것처럼 따가웠다고 한다. 아드님은 이미 물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할머니는 바람 속에서 물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물 안이 호박빛으로 환해지고 할머니는 허둥거리는 아드님의 다리를 보았다. 꽉 잡았다. 빛은 사라지고 할머니는 물위로 떠올랐다. 아드님은 눈을 허옇게 뒤집고 실신한 채였다. (...) 그렇게 건진 아드님이 옥에서 어느 날 비명횡사할 때 할머니는 물 안을 비추던 어떤 빛도 보지 못했다.


- “잘 모르겠어요. 저는 저를 위해서만 사니까... 불안해요,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


- 시장가에 있는 가페에서 커피를 한잔 시켜놓고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풍겨나오는 생선 냄새를 맡는다. 그 옛날, 내가 나를 책임지지 않아도 되었던 시절, 어머니와 함께 저녁 무렵이면 함께 시장으로 갔다. 그때 그 시장에서 어머니의 작은 지갑에서 나오는 돈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나는 몰라도 되었다. 그때 나는 사람들 사이를 오가는 그 생선 냄새를 맡았던 것. 내가 나를 책임지지 않아도 좋았을 무렵의 냄새......

이 밖에 '신화적 존재', '평화주의자', '예쁜 뒤꼭지', '나는 아버지에게 단 한 번도..로 시작하는 글', '난쉐와 그 여신이 보호했던 많은 이를 위하여' 등의 전문이 좋았다.


나와 고향이 같고 타지살이 하고 있는 것도 같다. 그렇게 길게 외국에서 타지살이한 경험은 없지만 이 책에 수두룩하게 적힌 외로움이 공감됐다. 물론 고향에 대한 감상은 나와 조금 다르지만... 읽으면서 수필은 나와 맞지 않다고 투덜거렸지만, 책을 펴서 활자를 눈에 담은 순간 만큼은 모든 걸 잊고 이 지친 소녀 같은 시인이 쓴 글에 푹 빠져있었다. 자기 전 읽기 좋았던 책으로 기억될 것... 이미 고인이 된 작가와 혼자서 내적친분 쌓은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