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2001)

피아니스트 (2001)

(스포있음) 주인공은 피아니스트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어머니와 함께 산다. 사생활에 간섭하려는 어머니와 맞서 싸울때면 감정이 최고조에 달해 육탄전도 마다않지만 평소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교수생활을 할 때면 주인공은 완벽한 이론과 프로패셔널함으로 무장한다. 감성과 이성, 주인공은 이 두 가지가 너무나 극단적이어서 이중생활처럼 보이기도 한다. 


피아노를 칠 때 손가락을 제어하는 기술이 이성이라면, 자신만의 감정으로 곡을 해석하고 풀어내는 능력은 감성이다. 이 두 가지 조화로 피아니스트가 탄생한다고 했을 때, 이 영화의 주인공은 피아니스트인가?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다,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다는 욕망이 오랜 시간 억압되자 주인공은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하게 된다. 남성들이 야한 비디오를 보는 가게에 가서 정액이 묻은 휴지 냄새를 맡는다든지, 자동차 극장에서 이뤄지는 남녀간의 섹스를 보고 오줌을 눈다든지, 성기부위를 자해하고 그 피를 흐르게 내버려두어  생리를 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든지. 솔직히 보는 내내 그 뒤틀린 욕망이 충격적이고 역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됐다는 생각이 든 건 그 다음이고...

이런 주인공은 결국 매저키스트 같은 성적취향을 가지게 되는데, 오히려 이 부분은 이해가 됐다. 누군가 이 세계를 깨버렸으면 하는 마음, 도저히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벗어 던지고 싶은 마음, 박살나고 싶은 마음이 이해됐다. 그렇게 절박하다보니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어린 대학생의 말을 철썩 같이 믿지 않았겠나. 위태롭던 감성과 이성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한 번 날뛰기 시작한 감성은 점차 주인공을 지배해 갔다.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교수였던 모습은 사라지고 모든 교수가 훌륭하다 말하는 어린 대학생의 피아노 실력에 혼자 태클을 걸거나, 어린 제자의 주머니에 깨진 유리 조각을 넣는 짓을 서슴치 않았다. 

내가 역겹니?

자신의 성적취향을 담은 편지를 보여준 주인공이 대학생에게 글썽이며 묻는다. '역겹지 않을 리가.'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 된 이유나 과정, 서사를 보여주지 않은 채 결과만을 들이밀며 사랑해 달라는 협박, 애원에 가깝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 이유는 대학생을 교감의 대상이 아닌 '도구'로 밖에 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자신의 판타지를 실현해 줄... 주인공에게 사랑은 이미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욕망인 것이다. 이야기의 마지막, 해맑은 대학생의 인사를 받으며 주인공은 이 나락에 혼자 빠져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 아닐까. 본인이 아닌 그 누구도 이 세계를 깨뜨릴 수 없다는 깨달음.  ​

보면서 정말 불쾌했는데 보고나서도 후유증이 꽤 커 한동안 영화를 보지 못했다.왓챠 평점도 낮게 매겼다. 연출이나 연기, 대사 모두 불만은 없었지만... 내용이 정상이 아니잖아! 싶은 것이다. 도대체 이 영화를 누구에게 추천한단 말인가?  그러다 문득 떠오른 헤르만 헤세의 명언.

만일 당신이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당신은 그 사람 안에서 당신의 일부인 어떤 점을 발견하고 미워하는 것이다.

영화에 부정적 감상을 뱉다가도 이 말을 떠올리면 뜨끔하게 되는 것이다. 혹시 억압하는 환경적 요인을 만나게 된다면 모르는 일이다. 나 역시 변태가 되거나 광기를 드러내게 될 지도. 모두가 그런 여지를 가지고 있는 이상, 그 누구도 이 영화를 완벽히 싫어하거나 배척할 수 없을 것이다.